
도박 손실자엔 “보상해주겠다”…새 계좌 개설 뒤 비밀번호까지 확보
공공기관 사칭해 영세업체엔 대리구매 요구…22명 피해·약 6억원 편취 혐의
태국 파타야 리조트 3개 층 콜센터 운영…10명 송치·8명 구속
사기의 시작은 돈이 아니었다. 계좌였다.
경찰에 따르면 태국 파타야에 거점을 둔 사기 조직은 먼저 사설 도박사이트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에게 접근했다. “보증보험사를 통해 손실을 보상해주겠다”고 속인 뒤 새 계좌를 만들게 하고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넘겨받았다.
그 계좌는 다시 다른 피해자의 돈을 받을 통로가 됐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이 같은 방식으로 범행계좌를 확보한 뒤 국내 공공기관을 사칭해 영세 납품업체 22명으로부터 약 6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조직원 10명을 검찰에 넘겼다고 16일 밝혔다. 이 가운데 8명은 구속 송치됐다. 경찰은 범죄수익 중 약 5천700만원을 특정해 기소 전 추징보전했다.
첫 번째 거짓말은 ‘손실 보상’…계좌가 범죄 도구로
조직은 대포계좌를 외부에서 단순히 사들인 것이 아니라 별도의 사기로 직접 확보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설 도박사이트 이용자에게 업체 관계자를 사칭해 “손실 보상을 받으려면 거래내역을 만들어야 한다”고 접근했다. 이후 새 계좌 개설을 유도하고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넘겨받았다. 경찰은 이렇게 확보한 계좌가 이후 노쇼 사기 피해금을 받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단계에서 첫 번째 피해자는 단순히 개인정보를 잃은 데서 끝나지 않는다.
본인 명의 계좌가 다른 사기 피해금의 수취계좌로 사용될 경우 거래정지나 수사 과정에 휘말릴 수 있다. 한 사람을 속여 확보한 금융수단이 다음 피해자를 속이는 범죄 인프라가 된 셈이다.
두 번째 거짓말은 ‘공공기관 대량 주문’
두 번째 단계에서는 상대가 바뀌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조직은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대학, 교육청, 교도소, 시청 등의 직원을 사칭해 국내 설비 납품업체에 접근했다. 처음에는 실제 취급하는 물품을 대량 주문하며 거래가 성사될 것처럼 신뢰를 쌓았다.
이후 “소방점검 때문에 급히 필요하다”며 피해업체가 취급하지 않는 소화기 등 다른 물품을 대신 구매해달라고 요구했다.
문제는 이들이 알려준 ‘지정업체’였다.
실제로는 조직이 꾸며낸 가짜 업체였고, 납품업체가 대리구매 대금을 송금하면 주문 자체도 사라졌다. 피해자 22명이 지난 2월 24일부터 4월 8일까지 입은 피해액은 경찰 추산 약 6억원이다.
‘노쇼’라는 이름보다 복잡해진 범죄

경찰은 지난해부터 기관 관계자를 사칭해 대량 주문을 넣은 뒤 피해업체가 판매하지 않는 상품을 특정업체에서 대신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유형을 ‘노쇼 사기’로 집중 경고해왔다.
과거에는 식당 예약이나 군부대 단체주문을 가장하는 사례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시청·교도소·학교 등 공공기관을 사칭하고 위조 명함과 사업자등록증까지 활용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경찰청은 2025년에도 기관 사칭 노쇼 사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특별경보를 발령했다.
올해 들어서는 금융당국의 대응도 달라졌다.
금융정보분석원은 6월 30일부터 노쇼 사기와 로맨스스캠 등 신종피싱에 이용된 것으로 의심되는 계좌를 금융회사가 우선 7영업일 동안 임시정지하고, 필요하면 최대 60영업일까지 추가 정지할 수 있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시행 한 달 동안 임시조치된 의심계좌만 4천935건이었다.
파타야 리조트 3개 층…사기조직도 ‘성과급 체계’
범행은 태국 파타야의 한 리조트를 거점으로 이뤄졌다.
경찰에 따르면 50대 한국인 총책은 지난 2월 리조트 1~3층에 콜센터와 숙소를 마련하고 아르바이트 사이트와 지인 소개를 통해 조직원을 모집했다. 조직 규모는 11명가량으로 파악됐다.
역할도 세분화됐다.
대포계좌 모집과 노쇼 사기 업무를 나눠 맡겼고, 범행 시나리오를 미리 교육한 뒤 전화에 투입했다. 계좌 모집에 성공하면 건당 300만원, 노쇼 사기가 성공하면 편취액의 10%를 수당으로 지급한 것으로 조사됐다.
총책과 관리팀장은 조직원의 여권과 휴대전화를 관리했고, 텔레그램으로 매일 실적을 보고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규칙 위반 시 폭언이나 구타가 있었다는 것이 경찰 조사 내용이다.
경찰이 이들에게 단순 사기뿐 아니라 범죄단체 가입·활동 혐의를 적용한 배경이다. 다만 이는 현재 경찰 수사와 송치 단계의 혐의로, 최종 유죄 여부는 향후 사법절차에서 판단된다.
Next Insight 분석 | 피해자를 다음 범죄의 도구로 바꾼 구조

이번 사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6억원이라는 피해액만이 아니다.
범죄조직은 먼저 한 사람의 절박함을 이용했다.
도박으로 돈을 잃은 사람에게 “잃은 돈을 돌려주겠다”고 접근해 계좌를 확보했다.
그리고 그 계좌를 이용해 전혀 다른 사람에게 “공공기관이 물건을 사겠다”고 접근했다.
첫 번째 피해자의 계좌가 두 번째 피해자의 돈을 받는 수단이 된 것이다.
범죄는 더 이상 한 번의 전화로 끝나지 않는다. 피해자·계좌·가짜업체·해외 콜센터를 연결해 다음 사기를 만드는 공급망으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예방 기준도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공공기관 관계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자신이 지정한 다른 업체에서 물품을 먼저 사달라고 요구하거나, 손실 보상을 이유로 새 계좌를 만들어 비밀번호까지 넘기라고 요구한다면 거래를 멈추고 기관 공식 대표번호나 112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금융당국도 공공기관을 사칭한 대리구매 요청을 대표적인 신종피싱 유형으로 경고하고 있다.
한 번의 사기로 계좌를 만들고, 그 계좌로 또 다른 사기를 완성한다.
이번 사건이 보여준 ‘진화’는 바로 그 두 단계 사이에 있다.
취재·작성: 김귤연 기자 | Next Insight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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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금융범죄수사대 2026년 9월 16일 수사 발표, 경찰청 노쇼 사기 예방자료 및 공공조달 노쇼 사기 대응자료, 금융위원회·금융정보분석원 신종피싱 의심계좌 거래정지 제도 자료, 관련 언론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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