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소 6675억원 추정 실행계약보다 큰 ‘플랫폼 수출’의 의미
K9 기반 스페인 독자 차체·임무체계·생산능력 확보…K-방산 경쟁의 다음 단계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스페인에 K9 자주포를 수출한다. 그러나 이번 계약을 ‘K9 128문 판매’로만 보면 핵심을 놓친다. 스페인은 완성된 한국산 자주포를 그대로 사는 대신 K9을 출발점으로 자국이 설계권한과 생산능력을 갖는 새로운 자주포 체계를 만들고 있다.
6675억원 이상 추정…그러나 실제 물량·계약액은 비공개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31일 스페인 방산기업 인드라시스템즈와 K9 자주포 등을 대상으로 한 수출 실행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계약은 지난 28일 체결됐으며 물량·금액·기간은 비밀유지를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계약금액의 20%를 체결 후, 추가 5%를 연내 선급금으로 받는 조건이다.
한국거래소 공시기준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최근 매출을 적용하면 계약 규모는 최소 약 6675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계약금액이 아니라 공시기준을 역산한 하한선이다.
특히 이번 실행계약에서 한화가 K9 128문을 완제품 형태로 직접 공급한다고 확인된 것은 아니다. ‘128’이라는 숫자는 스페인이 추진하는 궤도형 자주포 현대화 프로그램의 목표 물량이다.
128문보다 큰 사업…4조5540만유로의 포병 현대화
스페인 국방부가 승인한 궤도형 자주포 ATP-C 프로그램의 최초 사업비는 45억5400만유로다. 사업에는 자주포뿐 아니라 탄약보급·구난·지휘통제·정비체계와 교육·시뮬레이션·기반시설까지 포함된다.
스페인 관보에 명시된 핵심 전력은 궤도형 자주포 128문이다. 그러나 45억5400만유로 전체가 한화의 매출이 되는 구조는 아니다. 스페인 기업의 현지 생산과 자체 시스템 개발, 지원차량과 후속체계 등이 함께 포함된 국가 포병 현대화 사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K9 계약이 7조원대로 확대된다’보다 ‘7조원대 국가사업의 기반 플랫폼으로 K9 계열이 들어갔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K9 위에 ‘스페인 자주포’…인드라가 갖는 설계권한

이번 사업의 성격은 지난 3월 인드라와 한화가 체결한 구속력 있는 협력합의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드라는 K9 계열을 출발점으로 궤도형 자주포 128대, 탄약보급차 120대, 지휘통제차 11대, 구난차 21대로 구성된 체계를 개발할 계획이다. 스페인에서 차량 차체를 생산하고 인드라의 임무체계·360도 상황인식·전장관리체계(BMS)·통신체계를 통합한다.
가장 중요한 표현은 ‘design authority’, 즉 설계권한이다.
인드라는 K9을 바탕으로 스페인 자체 차체를 설계·생산하고 그에 대한 설계권한을 확보한다.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무기를 조립하는 것을 넘어 스페인이 향후 발전시킬 수 있는 자체 차량 패밀리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구조를 압축하면 이렇다.
한국의 검증된 K9 플랫폼 → 기술 이전·현지화 → 스페인 차체와 임무체계 → 스페인 독자 자주포 패밀리.
스페인이 원한 것은 무기보다 ‘만드는 능력’
스페인이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는 포병 전력을 교체하는 동시에 자국 방산산업을 키우려는 전략에 있다.
인드라는 이 사업을 위해 히혼 지역 산업시설 등에 1억3000만유로를 투자하고 직접고용 500명, 간접·유발고용 1000명을 창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술이전 역시 스페인의 ‘기술주권’과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하는 핵심으로 명시했다.
이 요구에서는 단순히 값싸고 성능 좋은 무기를 빨리 가져오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도입국이 생산하고 개량하며 향후 다른 체계로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K9은 이미 폴란드·핀란드·노르웨이·에스토니아·루마니아 등 여러 NATO 국가가 선택한 운용 기반을 갖고 있다. 스페인은 이 검증된 플랫폼을 가져와 자국 산업기반과 결합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서유럽 첫 진입…완제품 수출보다 높은 문턱
이번 계약으로 스페인은 K9의 11번째 수출국이 됐고, K9은 처음으로 서유럽 시장에 진입했다.
이 의미는 단순한 국가 숫자 하나의 증가에 그치지 않는다.
자국 방산기반이 강한 유럽 시장은 무기의 성능뿐 아니라 현지생산, 기술이전, 공급망 참여와 장기적인 산업효과를 함께 요구한다. 한국에서 생산한 완제품을 보내는 방식만으로는 이런 시장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어렵다.
스페인 사업은 K9이 ‘한국이 만들어 파는 무기’에서 ‘다른 나라가 자기 무기를 만드는 기반 플랫폼’으로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는 사례가 된다.
Next Insight 분석 | K-방산의 다음 수출품은 ‘무기’가 아니라 생태계

K-방산의 첫 번째 경쟁력은 성능이었다. 두 번째는 가격과 빠른 납기였다. 그러나 세계 방산시장이 자국 생산과 공급망 안보를 중시하면서 세 번째 경쟁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상대국의 산업을 얼마나 함께 만들 수 있는가.
스페인은 K9을 도입하면서 한국산 자주포에 영구적으로 의존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K9이라는 검증된 기술적 출발점을 이용해 자체 설계·생산·개량 능력을 확보하려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한국이 기술을 넘겨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는 한국 플랫폼이 상대국 방산산업의 설계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플랫폼을 중심으로 교육·부품·정비·개량·탄약·후속모델이 연결되면 한 번의 완제품 계약보다 훨씬 긴 산업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물론 기술이전에는 경계도 필요하다. 이전 범위와 지식재산권, 향후 제3국 수출에서의 경쟁관계까지 관리하지 못하면 오늘의 고객이 미래의 경쟁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현지화의 성패는 ‘얼마나 많이 이전했느냐’가 아니라 핵심기술을 보호하면서 얼마나 오래 공동 생태계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이번 스페인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는 128문도, 6675억원도 아니다.
한국이 만든 K9이 스페인이 앞으로 만들 ‘자기 자주포’의 출발점으로 선택됐다는 사실이다.
K-방산의 다음 경쟁은 무기를 몇 대 더 파느냐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른 나라의 방산 생태계 안에서 한국 기술이 얼마나 오래 ‘기반 플랫폼’으로 살아남느냐가 새로운 수출 경쟁력이 되고 있다.
취재·작성: 김귤연 기자 | Next Insight News
nextinsight.news@gmail.com
참고자료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스페인 K9 자주포 등 수출 실행계약 관련 공시, 2026.8.31
Indra Group, Hanwha Group과 자주포 체계 개발 구속력 있는 협력합의, 2026.3.24
스페인 국방부, ATP-C 궤도형 자주포 특별현대화프로그램
스페인 관보(BOE), ATP-C 사업 범위 및 전력구성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인드라그룹 공식 발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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