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산 농·축·수산물 연 1조9천억원 판매 채널 흔들려…산지유통조직 미수금 269억원, 67개 점포 재개장에도 ‘거래 신뢰’ 회복이 관건
홈플러스가 67개 점포의 영업을 재개하면서 소비자들이 다시 매장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산지의 문제는 매장 문을 다시 여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홈플러스 사태가 보여준 것은 대형마트 한 곳의 경영위기가 농산물 판매처와 납품업체의 현금흐름, 다음 작기 생산계획까지 흔들 수 있다는 공급망의 취약성이다.
홈플러스가 흔들리자 산지의 돈부터 막혔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 6월 홈플러스 납품 산지유통조직을 조사한 결과, 정책자금 만기가 도래한 25곳 가운데 20곳에서 홈플러스 관련 미수금 269억원이 확인됐다.
정부는 이들 조직에 원금 상환을 유예하거나 추가 자금을 지원하는 등 약 300억원 규모의 금융지원에 나섰다.
산지유통조직은 농가의 농산물을 매입하거나 계약재배한 뒤 선별·포장해 대형 유통업체에 공급한다. 이곳에서 대금 회수가 막히면 피해는 농가로 내려간다.
마트의 유동성 문제가 산지의 농산물 매입자금 문제로 전환되는 구조다.
연 1조9천억원…마트가 아니라 하나의 ‘판로’였다
홈플러스 측은 연간 약 3조원 규모의 농·축·수산물을 판매해왔으며 이 가운데 국내산 판매액이 약 1조9천억원이라고 밝혔다. 이 수치는 정부 통계가 아니라 회사 측이 공개한 판매 규모라는 점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규모가 상당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특히 과일·채소·육류·계란·수산물처럼 저장기간이 짧은 품목은 거래처가 사라진다고 몇 달씩 출하를 미룰 수 없다.
공산품은 재고로 보관할 수 있지만 농산물은 익고, 계란은 매일 생산되며, 축산물에는 적정 출하시기가 있다.
그래서 농어가에는 가격 하락보다 ‘팔 곳이 없어지는 것’이 더 위험할 수 있다.
협력사 47% “매출 절반 이상 홈플러스 의존”
공급망의 집중도 역시 높았다.
홈플러스 협력사들이 법원과 정부에 제출한 탄원에 따르면 상품·용역 협력사는 4,603곳이며 이 가운데 약 47%가 매출의 절반 이상을 홈플러스에 의존한다고 밝혔다. 신선식품 공급업체 182곳도 회생을 요구하는 탄원에 참여했다.
이 수치 역시 전체 농가의 홈플러스 의존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상품·용역업체를 포함한 협력사 측 집계다.
그럼에도 한 유통기업이 흔들릴 때 납품업체와 생산자까지 충격이 확대될 수 있는 구조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납품 감소→빈 매대→고객 이탈’ 악순환
홈플러스가 어려워지면서 납품업체들은 대금 회수를 우려했고 상품 공급이 줄었다.
5월에는 상당수 매장에서 상품 부족과 고객 이탈이 겹치면서 매출이 전년보다 50% 이상 감소한 것으로 회사 측은 설명했다. 결국 37개 점포의 영업을 중단하고 상품을 67개 핵심 점포에 집중하는 조치까지 이어졌다.
유통업의 위기는 이렇게 증폭된다.
자금 부족 → 납품 감소 → 빈 매대 → 고객 감소 → 매출 감소 → 납품업체 불안 증가.
상품을 공급하지 못하면 소비자가 떠나고, 소비자가 떠나면 다시 납품업체가 공급을 주저한다.
유통업에서는 돈만큼 신뢰가 운전자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67개 점포 다시 열었다…그러나 정상화 판단은 이르다
홈플러스는 2천억원 규모의 긴급운영자금(DIP)을 확보한 뒤 8월13일 67개 점포를 정식 재개장했다.
13일부터 17일까지 닷새간 매출은 437억원으로 영업중단 전 비교기간의 150억원보다 191% 증가했다. 하루 평균 고객 수도 약 13만8천명에서 23만9천명으로 74% 늘었다.
분명 긍정적인 신호다.
그러나 대규모 할인행사를 동반한 초기 매출 반등과 장기적인 회생 가능성은 구분해야 한다.
진짜 정상화 지표는 할인행사가 끝난 뒤에도 고객이 남는지, 협력업체가 정상적인 조건으로 다시 납품하는지, 그리고 납품대금이 제때 지급되는지다.
홈플러스 회생계획안을 심리·결의할 관계인집회는 9월2일 예정돼 있고, 회생계획안 가결 기한은 9월4일이다.
홈플러스를 살리는 것과 농어민을 보호하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정책적으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홈플러스는 민간기업이다. 기업의 부실과 회생 책임은 주주·채권자·경영진 사이에서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
그러나 농가와 산지유통조직을 보호하는 문제는 별개다.
정부가 홈플러스에 직접 농업지원금을 지급한 것이 아니라 대금을 받지 못한 산지유통조직에 금융지원을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정 기업을 구제하는 것과 그 기업의 부실로 선의의 생산자가 연쇄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판로 집중’이다
홈플러스가 정상화되면 당장의 판로 공백은 완화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번 사태의 교훈이 끝나서는 안 된다.
한 대형 유통업체의 자금난이 농가의 다음 출하와 산지조직의 운영자금까지 흔들었다면 농산물 판매망 자체의 위험 분산이 부족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형마트·농협·도매시장뿐 아니라 온라인 유통, 공공급식, 산지직송, 로컬푸드 등으로 판로를 다변화하고 대형 거래처의 대금지급 위험도 관리할 필요가 있다.
농업에도 이제 ‘판로의 신용위험’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홈플러스 사태가 남긴 진짜 질문
대형마트는 법적으로 민간기업이다.
그러나 수조원대 상품이 움직이고 수천 개 협력사와 농어가가 연결되면 경제적으로는 유통 인프라의 성격도 갖게 된다.
그래서 홈플러스 사태의 핵심을 단순히 “마트 한 곳을 살릴 것인가”로 좁혀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한 유통기업이 흔들려도 농어민의 판로까지 함께 무너지지 않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
홈플러스의 매출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산지에서 정상화가 의미하는 것은 다른 숫자다.
내일 수확한 농산물을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가. 그리고 약속한 날짜에 대금을 받을 수 있는가.
그 두 가지가 회복될 때 비로소 홈플러스의 재개장은 농어촌에도 ‘정상화’가 된다.
취재·작성: 김귤연 기자 | Next Insight News
nextinsight.news@gmail.com
참고자료
- 농림축산식품부 홈플러스 납품 산지유통조직 지원자료
- 홈플러스 회생절차·긴급운영자금 및 점포 재개장 관련 자료
- 홈플러스 협력사·신선식품 납품업체 관련 자료
- 연합뉴스·한국일보 등 관련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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